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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제1차 단학대회 자료집

091214.hwp / 1989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제1차 단학대회 자료집입니다.

무려 20년 전 열렸던 관악 사회대 1차 단대학생대표자회의의 자료집이다.
사회대 학생회실 대청소를 하다 발견했다.

수많은 사회대 학생회의 자료들이 제대로 보관도 되지 않은채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이렇게 '전산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 몇몇 운동조직들이 외치고 있는 구호들, 보여주는 실천들이
생각보다 더욱 먼 시점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주장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학생운동의 역사'라 부를만한 것이 지금의 학생사회에도 여전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와 같은 '전통' 혹은 '경험'이 건설적으로 후배들에게 전달되지 못한 것이
현재 학생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몇몇 오류의 원인 중 하나라 생각한다.

전체 파일을 올림과 함께, 당시 제7대 관악 사회대 학생회장이었던 서창녕씨의
1차 단학대회 개회사를 옮겨놓는다.


관악 사회대 1차 단학대회 개회사

by 비여우 | 2009/12/17 21:58 | [취미] 주전부리 | 트랙백 | 덧글(12)

Mono - Moonlight

Mono
You Are There (2006)

아시아급은 이미 훌쩍 넘어선 무려 일본의 4인조 
Instrumental Rock, Post-Rock 밴드
Mono의 2006년 앨범 You Are There.

1999년 일본에서 결성된 모노는
초기에는 아시아 지역에서 공연 위주로 실력을 쌓다
첫 앨범을 뉴욕에서 발매한 이후 점점 명성을 얻어
지금의 세계적인 유명세를 가지게 되었다.

  모노의 음악은 Shoegaze와 Experimental Rock(Avant-Garde)
등의 장르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Contemporary Classical Music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굉장히 미니멀하고 깔끔하면서도 우울한 음악을 한다.

에서 자세한 정보를 찾아보실 수 있다.
http://www.mono-jpn.com/는 모노의 공식 홈페이지이다.
영어와 일본어의 두 가지 언어를 제공한다.

아래 영상은 모노의 라이브 DVD 앨범인
The Sky Remains the Same as Ever에 들어있는 것이다.


Moonlight
(Instrumental)

by 비여우 | 2009/12/11 21:21 | [음악] 날숨 | 트랙백

학생사회의 위기와 대리주의적 정치풍토

▲ 다들 어디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출처 :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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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말은 지루할만큼 자주 인용되는 관용어구이다. 그러나 '민중 해방의 불꽃' 관악 제53대 총학생회 선거(이하 총학생회 선거)는 도무지 이 관용어구 없이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운 이야깃거리다. 총학생회 선거 시작 이전 주장되었던 서울대 법인화 반대 투쟁을 위한 선거 연기 논의. 각 정치조직들간의 유난히 심했던 이합집산. 노골적으로 특정 단과대학 표심 위주로 짜여진 몇몇 선본의 선거전략들.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했던 선본들의 입장. 주의 6회로 말소되었어야 마땅한 한 선본의 선거운동 지속. 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관리 소홀과 투표함 조작 의혹. 의혹을 밝혀내겠다는 수단으로 감청을 택한 어느 선본의 독단까지. 이번 총학생회 선거는 논란과 의혹의 연속이었다. 의혹의 중심에 서 있는 이들 모두가 자신의 당당함을 주장하는 지금, 바로 그러한 오만이 학생사회의 근간을 발밑부터 무너뜨린 원인이라 한다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그 당당함은 결국 '누가 뭐라 하든, 정치는 우리가 한다'는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 수년간 학생회운동의 유효기간 종료 담론과, 복지vs정치/비권vs운동권이라는 프레임 속에 판쳤던 학생사회 내부의 대리주의적 정치풍토가 결국 이런 결말을 불러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것이다. 정치의 과정과 결과를 판단할 주체가 협소해질 때, 진보 혹은 보편적 권리는 자연스레 좁아진다. 그 결과를 어차피 자신이 책임지면 될 것이라는, 그 책임의 방식은 좋은 정치라는 사고가 팽배한다. 감청 문제를 당선으로 보답하겠다는 속내를 여과없이 드러낸 모 선본은, 대리주의적 정치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 적확한 사례였다. 학생사회는 소수가 책임지는 것이 아닌 학우대중 전체가 책임질 때에만, 비로소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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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수년간 학생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학생사회의 위기'였다. 학생과 사회, 위기를 정의내리는 방식은 모두 달랐고 자연스레 그 원인에 대한 분석 역시 모두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학생사회의 위기'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 학생운동진영이 이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적응, 돌파, 회피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대학생들이 보수화되었으며 더 이상 소수의 전위부위 혹은 강경한 조직노선을 제외하고는 학생운동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학생회 등의 자치기구에 조직적으로 개입하긴 하되 방점은 어디까지나 '활동가'(비하하는 표현으로는 '운동권') 양성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회피 혹은 무시의 방식이었다. 대학생들이 보수화되었으며 이는 전사회적 흐름이기에 학생사회는 생존을 위해 학우대중의 보수화된 언어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이에 맞는 활동공간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는 것. 정치와 복지의 이분법을 어느정도 인정하면서, 대중적인 담론을 우선 선점하고, '과도하게' 진보적인 담론들은 일부 부위가 전담하자는 것이 적응의 방식이다.
  적응과 회피의 방식이 보여주는 공통된 사고방식은 '학생사회가 더 이상 전체사회를 이끄는 역할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 학생운동이 선도적 역할을 했던 시기는 지나갔고, 학우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로 만들어내는 투쟁은 '쁘띠부르주아'적인 것이었기에 가능했거나, 사실은 광범위한 참여 역시 허상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다수의견을 차지했다. 그/녀들에게 학생회는 지나간 시대의 것이며, 아직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미래는 없는, 석양을 맞이하고 있는 운동방식이자 전술이었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사회에서 가진 지분을 무시할 수는 없기에 정당, 당원, 활동가, 조직 등이 학생회에 적극 개입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최근 대다수의 의견인 듯하다.
  이러한 판단에는 다양한 근거들이 존재한다. 제프 일리가 '묘비같은' 저서 "The Left"에서도 지적했듯, 학생운동은 보통 대학생들이 빠르게 졸업해야 하는 현실로 인해(사이클이 짧다) 쉽게 끝을 맞는다. 대학생은 맑스주의적으로 계급의식을 가질 하등의 '필연적'조건이 없으며,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힘이 강할 때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유인되는 쁘띠부르주아적 성향이 강하다. 특히 서울시내의 대학들의 경우 대학생의 구성비 자체가 점점 부유층에서 충원되고 있는 상황이며, 대학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대학이 계급구조화의 첨병이 된 것이다. 전사회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흐름이 존재하며, 항구적인 경제위기는 관조적 지식인이기보다는 예비실업자의 위치로 추락한 대학생들이 진보적 담론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했다. 좌파 혹은 운동권 선배들의 역사적인 과오들(스탈린주의, 이단계 변혁론, 반여성주의 등)은 진보세력의 헤게모니 장악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구조적으로 대학생들의 보수화가 당연하고, 대학생 전반이 진보세력으로 편입될 어떤 물적토대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학생의 광범위한 대중참여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선동 혹은 환상이거나 말 그대로 '의지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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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이러한 언설은 내게 제주도민의 계급구성에서 절대다수가 쁘띠부르주아이기에, 제주도에서는 유의미한 변혁운동이 사실상 어렵다고 말했던 모 블로거님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지역운동을 부르짖는다는 모 학생정치조직 동지들이 2007년에, '우리 지역에는 이랜드 매장이 없어서 비정규직 투쟁 하기가 어려워요. 저희도 솔직히 하고 싶네요. ^^'라고 당당하게 게시판에 올렸던 일도 떠오른다. 한 과/반의 학생회장이라는 이가 '애매하게 진보적인 애들이 제일 위험하다. 활동가는 타고나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반엔 운동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고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 이 세상에는 남성이 절반이라 여성주의 운동은 결과적으로 절반만 성공할 것이라던 어떤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블랙코미디도 생각난다. 그/녀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대중은 없다'는 것이다. 대중은 어리석으며 개인은 현명하다, 그리고 조직은 더욱 현명하다. 그/녀들이 그렇게 경계해 마지않는 아나키스트들의 목소리가 바로 그랬다. (사례를 확인하고 싶으시면, 제 블로그 내부의 엠마 골드만에 대한 포스팅을 읽으셔도 괜찮다.)
  이를 역으로 돌려 '대중에게 정치를 주지 마라, 정치는 개인에게, 그보다는 조직에게 줘라.'라 결론내리는 이들은 명민하면서도 위험한 이들이다. 대중은 어리석다는 언설은, 현실에서 '어리석음은 정치참여를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다'라는 당위명제는 가뿐히 건너뛴 채, '대중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편이 낫다'로 이어진다. 학우들의 볼멘소리를 '혀 짧은 소리', '그냥 진보적인 담론이 감정적으로 싫은데 불만의 근거는 없으니 저러는 것', '지금의 목표는 어리석은 대중(반동)과 싸우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그 외양이 다를 뿐 사실은 모두 같은 주장이다. 이는 결론적으로 정치의 주체를 소수에게 제한하자는 이야기이다. 그게 일당독재든, 과두제든 뭐든간에 말이다.
  그러나 과연 대중은 없는가. 어째서 투쟁의 주체로 상정되는 노동자계급 혹은 노동자민중은 이른바 '후진노동자'를 포함하는 반면, 학생운동에서 학우대중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일부 '명확한' 선진 인자만을 이야기하는가. 이는 학우대중이 '지금 운동하고 있지 않다'는 인식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명확한 투쟁의 물적 토대는 노동자계급에게 존재한다'는 의식의 결합으로 생겨난다. 최근 학생운동사회에서 인기리에 퍼져나가고 있는 파시즘 경계 담론은 이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명확하게 투쟁해 본 적도 없고, 그럴 리도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촛불집회'와 같은 투쟁은, 활동가들에 의해 제대로 선도되지 않고서는 파시즘이 된다."는 것이다. 파시즘은 '애매한 진보'보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경제적 인간'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냈다는 역사적 연구결과는 어디론가 기각된 채, 이 담론은 힘을 얻고 곳곳으로 전파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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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 대중이 없는지 답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현 시기 대중운동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이들이 정작 그/녀들이 말하는 '대중'과 함께해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 혹은, 정치의 주도세력이 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지는 이득이 대중운동을 포기하면서 생기는 손실보다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러한 대리주의적 정치풍토가 강해졌을 것이라 판단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이고 경험론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변혁운동은 중요한만큼 나름의 분석을 가진 언어들로 정립될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이 투쟁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자본주의 사회 혹은 자본주의의 물적토대는 노동계급을 투쟁의 주체로 성립/호명한다는 이론은 오래된만큼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단박에 반박될만한 성질의 것도 아니다. 앞으로 더욱 많은 논쟁들과 연구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은 노계급VS자본주의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성격 자체로 인해 인간 대 자본에 가까운 모습을 띠게 될 수밖에 없으며, 전사회적인 연대는 여기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물론 경제적 토대로부터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불러일으키지만, 여성/대학생/철거민/실업자/생태환경 등 소위 '부문'에서도 강력한 투쟁들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생산에 균열을 내기 위한 시도 역시 노동자들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음을 우리는 온갖 '총파업'들을 통해 보고 있다. 생산은 전사회적인 것이기에, 가장 맑스주의적인 노동운동 역시도, 가장 전사회적인 연대를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노동운동 외의 운동들을 '부문운동'으로 부르며, 한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던 과거는 옳은가.
  이와 같은 관점에서 대학생을 대중으로 인정하지 않고 정치의 객체로 만드는 것은, 물론 반박의 여지가 있겠지만 변혁운동을 저해하는 길이다. 정치의 객체는 자연스레 정치에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오는 것이 지금 그렇게 우려하고 있는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애매한 진보성을 가진 이들이 대중을 선전/선동하면서 발호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보세력이라는 자들이 명확한 운동과 대중을 갈라놓으면서 자기 자신의 헤게모니를 잃어갈 때, 강력한 권위주의 세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발생한다. 대중운동은, 민주주의는 진보 운동의 원칙이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동등한 힘관계를 가지고 꺼내놓을 수 있는 것, 논의될 수 있는 것,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 아니었던가? 그 외에 무엇을 가지고 인간해방을 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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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주체와 객체는 어떠한 경우에도 나눌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전략' 혹은 '전술'의 이름으로 채택되었을 때 유리함이 있다 생각되는 경우에도 그렇다. 정치의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이자 '옳지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논의 체계의 효율성을 위해 불가피하게 침해되는 경우에는, 이를 각 개인에게 통보하고 승낙을 받아야 한다. 지금의 학생사회는 이러한 승인 절차는 물론이거니와 승인 자체가 잊혀졌거나 없어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대리주의' 정치를 이야기하며 학우대중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노동운동에서의 '전위' 개념 혹은 '당' 개념이 정치의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것인지는 앞으로 더욱 치열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의회주의 정당과 의회라는 기구는 어떤지, 학생사회 내부에서는 학생회 혹은 학생정치조직은 어떤지도 매 시기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비록 필자 자신의 과문함으로 인해 학우대중/인민대중이 삶을 통해 어떠한 운동을 하고있는지 혹은 노동자계급만이 변혁운동의 주체로서 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분명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의조차도 '대중' 사이에서 끊임없이 환기시키려는 노력이 있을 때에만 옳은 답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옳음'이 이미 학문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도출되어 있다는 오만이야말로 이른바 지식인들이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옳음'은 언제나 인민대중의 실천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으며, 지식인들은 이를 뒤따라잡아왔기 때문에.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왜 해가 진 후에야 날고 낮에는 보이지않는지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이는 개인적인 입장을 담은 글로, 제가 속한 단위의 입장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습니다.

by 비여우 | 2009/12/10 18:02 | [잡설] 날적이 | 트랙백 | 덧글(2)

091210

가만히 드러누웠다.

세포들의 신진대사 전반이
흙의 입자들과 조응하였다.

피로라는 미생물에 녹아드는 몸.
이중나선의 기억장치에 새겨놓은 실패는
후대에는 전해지지 않으리.

제대로 썩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질소가 부족하지 않은 땅에
상심의 빛깔을 띤 억센 뿌리가
죽은 입자들을 으깨었다.

by 비여우 | 2009/12/10 01:26 | [일기] 사나가나 | 트랙백 | 덧글(3)

091208

밤길은 나와 함께 걷고 있었다.

어디서 낙엽이
쓰레기 굴러가는 소리로 날리고
나의 발걸음은
그 부스럭거림을
견디지 못한 채 멤돌았다.

고양이 한 마리가 도망간다.

낙엽이 문젠지
쓰레기가 문젠지
그도 아니면
내 구둣발 소리가 문제였는지는
오로지 밤길만이 알고 있었다.

by 비여우 | 2009/12/08 22:37 | [일기] 사나가나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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